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왜곡/무장폭동설 (문단 편집) === [[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교도소 습격 사건 실체는 민간인 살상을 위한 행위였다?]] === [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WatchfulPurpleWickedTooth, 합의사항1=주장이 아닌 정확한 근거없이는 해당 문서 존치하기)]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 [youtube(ASL24d6WckA,width=640,height=360)] 무장폭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는데, 이것 자체로도 폭동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반론이 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한도희 씨는 1995년 한 지방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라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증언했다.]] 일부에서 법원 판결을 들기도 한다. 법원 판결에 따르면 시민군이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http://glaw.scourt.go.kr/wsjo/panre/sjo100.do?contId=1980730&q=%EC%A0%84%EB%91%90%ED%99%98&nq=&w=panre§ion=panre_tot&subw=&subsection=&subId=2&csq=&groups=6,7,5,9&category=&outmax=1&msort=s:6:0,d:1:1,p:2:0&onlycount=&sp=&d1=&d2=&d3=&d4=&d5=&pg=30&p1=&p2=&p3=&p4=&p5=&p6=&p7=&p8=&p9=&p10=&p11=&p12=&sysCd=WSJO&tabGbnCd=&saNo=&joNo=&lawNm=&hanjaYn=N&userSrchHistNo=&poption=&srch=&range=&tabId=0|#]] 그러나 법원 판결에선 시민군이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내용만 나오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내용은 없다. 만약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할 정황이 교도소 습격말고 없다면 당연히 교도소 습격설이 타당하나, 당시 교도소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파일:s34sBbmhWWkT_cr.png]] 근본적으로 광주교도소는 광주에서 담양, 곡성 쪽으로 빠져나가는 [[29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동광주IC]]가 교차하는 곳 사이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충지이다. 즉 광주교도소가 궁벽한 땅끝마을에 있어서 거기까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담양, 곡성, 순천 방향으로 피난 가든지, 놀러가든지 하려면 광주교도소 몇 미터 옆을 스쳐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사건 직후 계엄사는 폭도들이 교도소를 5차례 습격하였다고 주장하였고, 현재 광주 민주화 운동 왜곡 세력은 6차례 습격하였다고 주장한다. 광주교도소는 1차 진압을 맡았던 31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 31사단은 사단장 정웅 소장이 시위 학생들의 말을 경청하고 가급적 유혈사태를 막고자 하는 온건 방침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때도 광주 시위대 차량이 2차례 도로를 지나가려고 했지만 31사단 측의 철수 권고로 자진 철수를 하였으며, 이후 3공수여단에게 인계 하였을 때 비로소 "총성"이 들려왔다. 나중에 20사단이 광주 교도소를 다시 인계 받은 후에는 교도소 인근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일부는 광주교도소 습격(?) 여부를 알려면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를 살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5년 검찰에서 작성한 5.18관련 사건 수사 결과(1995.7.18)에 따르면 1980년 5월 22일 00:40경 시위대가 고속버스 2대, 픽업 1대, 1/4톤 트럭 3대 등 차량 6대에 나누어 타고 광주교도소에 접근, 3공수여단과 교전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같은 날 09:00경 시위대 6명이 트럭에 탑승하고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 접근했으며, 경계근무 중이던 3공수여단 11대대 11지역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져 시위대 3명이 사망하고 수명이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으며 3공수여단은 고속버스 2대, 트럭 1대, 픽업 1대와 LMG 1정, M1소총 1정, 칼빈 4정과 실탄 약 4백발을 회수하였다고 하고 있다.[*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110페이지,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7. 18]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당시 3공수여단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3공수,265/1,261 광주교도소 경계, 남부 고속도로 차단[*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 93쪽] 3공수여단은 남부 고속도로 차단을 하면서 교도소 부근에서 수많은 학살을 벌였다. 여기서 황당한 것은, 이 3공수여단 머저리들은 광주교도소 일대가 국방장관령 군사작전지역으로 봉쇄되었다는, 사람 목숨이 달린 중요한 사실을 경고 방송이나 계도 활동 등으로 제대로 알리려는 노력은 일절 하지 않고 [[트리거 해피|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가는 차량이 있으면 경고 한 마디 없이 보이는 대로 그냥 막 쐈다는 것]]이다. > 5. 21.의 자위권 발동과 함께 다량의 실탄을 지급받고 광주시 외곽 주요 지점에서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계엄군들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묻지마 살인|계엄군들은 외곽봉쇄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고, 외곽지역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3공수여단이 철수해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에서도 민간인 살상이 발생한 것을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서서 94~95쪽] 해당 부분을 다시 보자.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실제로 3공수여단 전투상보에도 무장시위대가 바리케이드로 돌진한 것으로 나온다. >익일인 5.22일 08:20-08:50까지 수색작전 실시하였으나 흔적은 발견 못함, 수색작전간 노획버스 1대로 정문에서 약 50미터 이격지점에 도로를 차단, 수색 복귀 후 09:00경에 2 1/2톤 탑승한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했으나 50미터 전방의 바리케이트에 봉착 진출을 못하자 이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2명 사살, 4명은 부상을 입고 도주 전과(아군: 피해 무, 2 1/2톤 1대 노획, 칼빈 1정, 실탄 230발, 엠원 1정, 엘엠지 1정 노획) 전투상보에도 바리케이드에 봉착한 사실이 드러난다. 교도소 습격 목적이란 건 3공수여단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3공수여단의 추측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3공수여단의 바리케이드에서 벌어진 충돌이다. 원래 3공수여단은 당시 미리 수하를 한 뒤에 발포해야 했지만 3공수여단은 그러지 않았다. >5. 21. 18:49 전교사는 ‘확인사격 지시(전상자전 제611호. 5. 21. 20:55)’를 하달했다. 수하 불응시 사격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송암동 20사단 사건, '''광주교도소 발포''', 주남마을과 녹동마을 주민들에 대한 총격 등은 '''수하 자체가 없는 발포였다'''. 5. 24. 외곽봉쇄 작전 부대교대 지시가 내려졌다. 이때 전 부대에 사격을 중지하고 먼저 확인한 뒤 불응하거나 먼저 사격하면 대응 사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날 하루 두 차례나 오인사격이 있었다.[*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 102쪽] 당시 3공수여단은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했지만 그것조차 불순분자들의 선동으로 인한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착각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그러니까 교도소로 접근하지 않은 무장 시위대도 교도소 습격으로 착각했으며, 무장시위대한테는 교도소 습격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교도소 경계 병력을 공격할 동기가 존재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했을 거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자 계엄군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왜곡 행위를 벌였는데 훗날 국방부 조사 결과 날조로 밝혀졌다. >전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에는 당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류락진의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 복역 중인 류락진을 구출하도록 선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류영선은 시위군중과 함께 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보안사, 383-1989-8, 89쪽). 그러나 이 개요는 ‘5. 18’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기 위한 의도에서 조작됐음이 위원회 조사결과 밝혀졌다. 류락진이 광주교도소에 복역한 것과, 류영선이 총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에 의해 시위주동자로 예비검속됐던 딸 류소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또 류영선은 소재를 모르는 조카 류소영을 찾으려다 계엄군의 과격진압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5. 21. 전남도청 앞 발포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다. [*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 118쪽] 죽은 사람은 변호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습격했다는 조작을 벌인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